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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독서생활

[밀리의 서재 입문 추천] 친밀한 이방인(정한아) -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한다 / 빛나는 하이라이트 뒤에 숨어있는 것

by 시골댕댕이 2023. 2. 1.

밀리의 서재 입문작으로 가볍게 읽기 좋은 소설 추천 - 친밀한 이방인(정한아)


수지 주연의 쿠팡플레이 시리즈물 <안나>의 원작, 정한아의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읽었다. <안나>의 원작이라는 것 외에 아무 정보도 없이 읽기 시작했기에(작가이름도 보지 않고 첫 장부터 펼쳤다), 외국 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 장 넘기지 않아 주인공이 다른 인물과 접선하는 장소로 '광화문에 위치한 카페 이층'이라는 곳이 등장하여 한국 소설임을 알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광화문이라는 장소와 카페 이층이라는 실제 있을법한 이름은 괜한 친근감을 주었다.

초장에 느낀 친근감이 무색하게 소설의 표현은 날 것에 가까웠다. 담담하게 풀어냈으나 극 중 주인공과 화자의 생은 꽤 어둡다. 축축하고. 화자는 (어두운 면으로) 현실적인 결혼/이혼 생활을 보여주고, 주인공인 이유미는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단조버전처럼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간다.

대학 합격했냐는 가난한 아빠의 기대 가득한 물음에 의도치 않게 시작된 S여대 학생 행세는 그녀가 반짝이는 하이라이트의 삶을 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어버린다. 남들은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십여 년을 노력해 얻은 산물들 (S여대 대학생이라는 타이틀, 음대 강사라는 타이틀, 의사라는 타이틀...)을 안나는 간단한 위조와 잘 설계된 거짓말로 쉽게 얻어낸다. 반짝반짝 빛나는 하이라이트의 연속으로 살게 되는데, 이는 안나가 유일하게 진실로 살았던 아르바이트 시절 고용주(라 쓰고 갑질을 일삼는 부잣집 딸이라 읽는다)가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는 바람에 들통날 위기에 처한다. 거짓말-탄로-거짓말-탄로의 반복으로 소설은 진행되는데, 그 연속된 거짓말을 하는 안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비교가 불행의 근원이라지만, 우리는 너무 비교하기 쉽게 자라났다. 가까운 곳에선 학력, 학벌, 재산, 사는 곳... 그 편이 서로를 판단하고 동질적인 집단을 만들어내기 쉽고 빠르니까. 단 한 번도 '자기편', '동질적인 집단'에 속해보지 못한 가난한 고졸의 안나는 거짓으로라도 그 반짝임을 사고 싶었을 것이다.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비하인드신을 비교하지 말라"

인스타그램을 이용하면 할수록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곤 했다. 지우다 설치했다를 반복했지만 과감하게 탈퇴하기는 또 어려웠다. 나도 내 일상에서 기억하고 싶은 순간, 아름다운 순간만 피드나 하이라이트로 올리면서도, 친구나 지인의 해외여행, 시험 합격, 승진, 비싸 보이는 집이나 식사 등에 박탈감을 매번 느낀다. 타인의 행복 앞에서 내가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는 순간이 올까? 나의 반복되고도 깊어지는 고민이다. 무턱대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자'는 되뇜보다는 (실제로 사람들은 don't 명령을 하면 오히려 더 do 하게 된다고 들었다), 요즘은 "일상에 낙원이 있지 않으면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새기며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친절한 이방인>은 안나의 하이라이트 뒤에 숨어있는 장면들을 낱낱이 보여주며, 소소하고 초라해 보일지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나)의 일상에 감사/만족하라고 하는 것 같다. 반짝이는 것은 잠시이고, 그 안에 거짓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마음에 담은 구절

  • 진정한 피아니스트는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했다.

  • 누구나 자기의 환상을 좇는 것이다. 매일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거나, 인내심을 팔거나, 웃음을 팔거나, 아무튼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다 팔고, 고시원에 돌아와 문을 닫고, 드디어 혼자가 되어, 정말 혼자라는 것을 즐기기 위해 손바닥만 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맵고 짠 음식을 먹으면서 땀을 흘렸다.

  • 이유미가 능숙한 거짓말쟁이였다면, 임재필은 이기적인 방관자였다. 남편은 내가 부탁할 때, 간청할 때, 정확한 지령을 전달할 때에만 아이를 돌봐주었다. 그런 식으로는 어떤 파트너십도 생길 수 없었다.

  • 그의 반듯함이 나의 난잡함을 드러내고, 그의 여일함이 나의 광기를 불러내고, 그의 밝음이 나의 어둠을 일깨운 것은.

  • 나는 그에게 포섭되는 대신 더 낮은 곳으로 추락했다.

  • 결혼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개입된다. 사랑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자체가 결혼의 동인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결혼한다.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낯선 사람과 함께 평생 살아가는 일조차 감수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 그 여자는 우리 앞에서 비굴하지도 않았고, 으스대지도 않았습니다. 차분하고 담담한 태도에 더 화가 치밀더군요. 의심의 여지없이 사랑받는 자의 태도였어요.

  •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에이, 하고 웃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그러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그 사람들은 모르는 거예요. 한평생 누군가에게 실망했다는 말을 듣는 심정을.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 사람의 눈에 들 수가 없고, 수준 미달, 기대 이하일 수밖에 없을 때 무엇을 포기하게 되는지 말이에요.

  • 그 여자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청년처럼 빛났습니다. 내 옆에서 노친네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욕을 하던 아내도 그 순간에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더군요. “사랑하는 거예요. 당신은 저런 사랑 해봤어요?” ... 우리는 십 년 넘게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해냈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습니다. 뱃속에도 또 하나가 들어 있었고요. 그런데도 그 순간 우리가 참을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단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 나와 똑 닮은 아들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아이와 나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 그런데 또 너무나 같다는 것. 내가 밀어낸 나 자신이, 그 자국 그대로 튀어나와 순수와 무구의 얼굴로 나를 보는 것. 그 기분을 아십니까. 네, 그게 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 퀴리 부인은 하루에 아이들을 안아주는 시간을 정해놓았다고 한다. 보통 삼십 분에서 한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이 아플 때는 삼십 분씩 더 안아주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과학적이면서 죄의식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퀴리 부인이 아닐 뿐 아니라, 생사를 접어두고 수행해야 할 인류적 연구 과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한 정신 나간 여자를 쫓고 있는 또 다른 정신 나간 여자일 뿐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평생 품고 살아갔던 의혹이기도 했다. 자신이 어딘가 결함이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

  • 남장을 하는 것은 노숙생활에 여러모로 편리했다. 몸에서 휘휘 돌아가는 커다란 옷을 입고, 팔자걸음으로 걷는 것만으로 여러 가지 귀찮은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였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다. 죄책감이나 후회 따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녀가 품고 온 삶에 대한 증오, 그것이 전부였다.

  • 그 여자는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젊은 시절 한때의 달콤함에 빠져 내게 주저앉은 아내를 봐도, 쉽게 알 수 있지요.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 여자를 붙잡기 위해 수없이 많은 거짓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 더욱 크게 발을 구르고, 목소리를 높였지요. 온 세상이 나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어요. 속는 자와 속이는 자는 함께 쾌락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후자의 것보다 전자의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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